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거대한 벽 앞에서, 국가는 당신을 어떻게 보는가 — 단편소설 『붉은 벽』

나룸이 2026. 5. 26. 15:18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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솔직히 말하면, 처음 몇 페이지는 좀 당황했다.

일본 전역을 둘러싼 정체불명의 붉은 장벽. 현대식 해상자위대 전함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장면. 단숨에 읽히긴 했는데, '이거 그냥 초반 스펙터클 자랑 아니야?' 싶었다.

그런데 아니었다.


벽은 배경이 아니라 질문이었다

이 소설에서 '붉은 벽(Red Wall)'은 단순한 SF적 장치가 아니다. 겉에서 보면 견고한 벽처럼 보이지만, 실상은 수천만 개의 미세한 플라즈마 구멍으로 이루어진 것. 빛과 전파는 통과시키되, 물리적인 것은 모조리 파괴한다. 이 묘사를 읽으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'국가'라는 단어가 떠올랐다. 뭔가를 보여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철저히 차단하는.

작가가 노린 것도 아마 그거였을 거다.


주인공 이수현이 측은한 이유

예비역 해군 대위 이수현은 아내를 잃은 사람이다. 그 상실이 그를 '구국 침공'이라는 위험한 임무로 끌어당긴다. 복수심 하나로 움직이는 인물이라 처음엔 좀 전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, 읽다 보면 그게 오히려 이 소설의 핵심 함정이라는 걸 알게 된다.

그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는다. 하지만 그 선택지 자체를 누군가 설계했다면?

좁은 잠수정 안에서 심해를 헤쳐나가는 장면들이 계속 나오는데, 그 폐쇄적인 공간감이 이수현의 내면과 딱 맞아떨어진다.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느낌. 읽으면서 답답하고 서늘했다.


진짜 악당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긴장감

핵과학자이자 연쇄살인마인 김승오는 분명 무시무시한 인물인데, 이상하게 그가 이 소설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. 더 섬뜩한 건 '구국회(救國會)'라는 비밀 조직이다.

이들은 이수현을 영웅으로 부르면서, 속으로는 그를 10kt급 EMP 폭탄을 실은 일회용 도구로 취급한다. 아내의 죽음까지도 국가적 대의를 위해 '설계'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후반부에 드러나는 순간 — 솔직히 책을 잠깐 내려놨다.

배신감이 느껴졌다. 내가 당한 것도 아닌데.


기술 묘사가 오히려 재미있다

심해구조잠수정, 매니퓰레이터(로봇 팔), 기뢰 제거 기동 같은 묘사들이 꽤 많이 나온다. 이런 장르 특유의 기술적 디테일을 싫어하는 독자도 있겠지만, 나는 오히려 그 부분에서 손에 땀이 났다. '레드 월'의 구멍 앞에서 기뢰를 하나씩 제거하는 장면은, 마치 폭탄을 해제하는 시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읽혔다. '48시간'이라는 제한 시간이 그 긴장을 극으로 끌어올린다.


책을 덮고 남은 것

이수현이 마지막에 마주하는 건 적이 아니다. 자신을 사지로 보낸 국가 권력과, 믿었던 스승의 기만이다.

"국가란 무엇인가"라는 질문이 거창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.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질문을 강연하듯 설파하지 않는다. 한 인간의 상실과 분노와 배신을 통해서, 독자 스스로 그 질문에 도달하게 만든다.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.

'붉은 벽'은 일본을 가로막은 장벽이 아니라, 권력이 개인의 삶 위에 쌓아 올린 기만의 벽이다.

그리고 그 벽은 소설 안에만 있지 않다.


테크노 스릴러를 좋아한다면, 혹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묵직하게 고민해보고 싶다면 추천한다. 단, 후반부는 생각보다 세게 때린다.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읽으시길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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